최 재 호

고봉(高峰)인문학경영연구소장 / 전 건국대 교수(경영학)

국가적으로 큰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비석'으로 알려진 경남 밀양의 표충비에서 최근 땀이 흐르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소식과 함께 과학적 진위논쟁이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된 표충비는 영조 18년(1742년) 사명대사(泗溟大師, 1544년~1610년)의 5대 법손 태허당 남붕선사(南鵬禪師)가 경북 경산에서 돌을 구해, 임진왜란 당시 구국의 영웅이었던 밀양 출신 승병장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세운 비석이다. 사명대사는 불교가 천시받던 당시 조선 사회에서 승려의 신분으로 시(詩), 서(書), 화(畵)에 능했던 최고의 지식인이자, 승병을 이끈 장수(將帥)로서, 또한 탁월한 외교가로 국난극복의 일익을 담당하였던 의승(義僧)이다. 

사명대사는 중종 39년(1544년) 밀양시 무안면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임(任),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이며, 본관은 풍천이다. 또한 법명은 유정(惟政), 당호는 사명당(泗溟堂)이며 별호는 종봉(鍾峯)이고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사명당은 어려서 황여헌(黃汝獻)으로부터 사사(師事) 한 후, 16세에 경북 김천의 황악산(黃嶽山)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으로부터 계(戒)를 받고, 명종 16년(1561) 선과(禪科)에 급제하였다. 당시 배불숭유(排佛崇儒)사상이 지배하던 조선 사회에서 불교를 극진히 숭상했던 중종의 비 문정왕후의 영향으로 잠시나마 불교가 성행하며 과거 고려사회에서 실시되었던 승과(僧科)가 부활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유정을 비롯하여 서산대사(西山大師)휴정(休靜, 1520~1604) 등 승과의 합격자들이 이후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크게 활약하는 데는 문정왕후의 호불정책(好佛政策)의 영향이 크다.

사명대사는 약관 20세부터 한양의 수도산 봉은사(奉恩寺)에 머물며 사찰 내 불서(佛書)를 포함한 모든 서적을 완독하는 한편, 허봉, 허균 형제를 비롯하여 임제, 이산해, 최경창, 고경명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을 자부하는 문인, 학자, 대부들과 교류하며 선(禪)과 속(俗)을 넘나들었다. 이같은 연유로 법명인 유정(惟政)보다는 당호인 사명당(泗溟堂)으로 더욱 잘 알려지게 되었고, 후세에 들어서는 사명당에 더욱 존경하는 의미를 담아 오늘날까지 사명대사로 지칭되고 있다. 그러던 그의 나이 32세 때 선종(禪宗) 봉은사의 주지에 추대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서산대사(휴정)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사명당은 금강산 보덕사(報德寺)에서 3년, 다시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등지를 유람하며 운수(雲水) 행각을 거듭하였다. 선조 19년(1586) 43세 때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에 뜰에 떨어진 꽃을 보며, 티끌 같은 세상, 이슬 같은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오랫동안 참선에 들었다. 하지만 이같은 그에게도 시련은 있는 법, 선조 22년(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던 그의 나이 49세(선조 25년, 1592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스승 휴정의 휘하에 들어갔으나, 휴정이 자신의 노쇠함을 이유로 승군(僧軍)의 통솔권을 물려받게 된다. 이후 명(明)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성을 탈환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함께 경상도 의령에 내려가 전공을 많이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 1594년에 불교 신자이기도 하였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초청을 받고, 그가 있는 울산 서생포 진중(陣中)으로 들어가 일본군의 동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당시 왜장 가등청정이 사명대사에게 ‘조선에 보물이 있는가’라고 묻자, 즉석에서 ‘천금만호(千金萬戶)의 상이 걸려 있는 당신 머리가 유일한 보물이다’라고 했다는 말은 한-일 양 국민 사이에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회자 되고 있다. 적진에 들어와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는 사명대사의 위세에 눌린 가등청정이 다시 지필묵을 내어주며 글을 부탁하자, ‘옳은 일이 아니고는 이로움을 찾지 말라/ 밝은 곳에는 해와 달이 있어서 비추고/ 어두운 곳에는 귀신이 있어서 다 안다/ 참으로 내 것이 아니거든/ 털 한 올이라도 탐하지 말라/’라고 일필휘지로 써 주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끝난 1604년(선조 37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은 사명대사는 국서를 받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일생일대의 단판을 벌려 3천 5백 명의 조선인 포로를 데려오는 동시에, 향후 260여 년에 걸쳐 동아시아에 평화를 지속시키는 계기를 만들며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다. 이 같은 사명대사의 영험함이 깃들어 있는 표충비에서의 한출(汗出)현상은, 오늘날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국내외적 상황에서 과학적 근거를 따지기 이전에 지극히 당연한 현상은 아닐는지. 성큼 겨울로 들어선 차가운 날씨에 금방이라도 한바탕 큰 눈이 쏟아질 것만 같은 대설(大雪) 절기이다.